임부택 소장은 제1연대가 창설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군번 110001번을 부여받은 바 있으며, 1946년에 육군사관학교(국방경비사관학교) 제1기생으로서 소위로 임관했다.
1950년 1월, 제6사단 제7연대장으로 부임한 후 북괴군의 남침 징후를 사전에 인지하고, 춘천 주민과 학도호국단의 지원을 받는 등 민·관·군 협력 하에 방어에 유리한 소양강변과 그 북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사전 전투준비 태세를 확립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제2사단이 춘천을 정면공격하자 7연대는 임부택 연대장의 효과적인 지휘로 병력과 장비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의 이점을 이용하여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했다.
북한강과 소양강 북방을 고수하면서 포병은 화력을 집중해 남진하는 적에게 심한 타격을 입히는 등 강력한 항전으로 막강한 화력의 북한군을 3일 동안 막아냈다.
전쟁초기 3일간 춘천지역에 대한 7연대의 성공적인 방어는 수도권에 집중적으로 투입된 국군 주력부대로 하여금 전열을 재정비하게 하여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갖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한 북한군이 6월 25일 개전 당일 춘천을 점령하고 수원으로 진격하여 국군의 증원부대와 한강 이북의 국군을 포위·섬멸하려던 초기 계획을 좌절시켰다.
이어 7연대는 7월 초순, 충북 음성 동락리 전투에서 남진 중인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매복·기습공격으로 격멸하여 개전 이래 국군의 가장 통쾌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부대원 전원이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부여받기도 했다.
동락리 전투의 승리로 국군이 진천-음성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형성하여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건을 마련했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2차 춘계 공세 때에는 용문산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았으나 임부택 대령이 부사단장이던 제6사단은 반격하여 전멸에 가까운 대승을 거뒀다.
6·25전쟁 사상 최대의 전승을 기록했으며, 제5사단 부사단장으로서 1951년 11월 공방전이 치열했던 동부전선의 351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1953년 7월 11사단장 재임시에는 휴전전투라고 일컫는 삼현지구 반격 작전에서 중공군 4개 사단의 공세를 저지하여 현재의 휴전선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임부택 소장은 6·25전쟁 기간 내내 연대장, 부사단장, 사단장으로서 최전방에서 대한민국을 수호했으며, 적 지휘관이 임부택을 사로잡으라는 특별지시를 내릴 정도로 탁월한 지휘력과 용맹성을 발휘해 생전에 두 차례의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2001년 11월 향년 83세로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김창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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