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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기 <영암소방서장> “눈물로 얼룩진 팽목항을 회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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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기 <영암소방서장> “눈물로 얼룩진 팽목항을 회고하며...”
  • 호남타임즈
  • 승인 2014.07.1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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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기 영암소방서장
세월호 침몰사고가 있는지 오늘로써 80여 일이 지나고 있다. 아직도 귀한 11명의 아들·딸과 부모형제들이 진도 맹골수도의 차가운 바다 속에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4월 16일 사고 당일 평소처럼 근무지인 영암소방서에 출근하여 시급한 업무들을 챙기던 중 진도 앞바다에 여객선이 침몰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라는 불안한 마음으로 비상상황을 대비 평소 훈련된 매뉴얼에 따라 직원 비상연락체계를 유지하고 즉시 출동할 수 있는 복장과 장비를 갖춘 상태로 상황을 예의주시 하던 중 상부로부터 전소방관서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우리署도 구급차 2대·미니버스·트럭 등과 함께 구조·구급대원 10명을 급파함과 동시에 비번 근무자를 소집, 진도 팽목항 출동으로 인한 공백을 메우고 우리관내 사건사고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았다.

필자에게도 사고 3일째인 4월 18일 현장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아마도 현장 책임인력이 필요한 듯 했다. 사무실에 들를 틈도 없이 사고현장으로 달려가는 사이 심하게 앓고 난 감기의 뒤끝이어서 인지 간혹 기침이 난다. 첫 번째 임무는 각 시도, 각계각층에서 지원된 자원의 관리였다. 구조는 더 이상 없었고 실신한 가족의 응급처치 및 병원이송이 주였다. 사고 3일째이지만 육상에서의 컨트롤타워는 볼 수 없었다. 2개의 텐트에 꾸려진 소방CP 만이 그 역할을 다하고 있을 뿐이었다.

긴급 구조통제단을 꾸리고 응급의료소를 설치하여 환자 중증도를 분류, 병원까지 이송하는 업무를 하면서 환자이송 통로확보, 중앙 지원기관 텐트 설치 장소확보, 보도자제 요청, 교통질서 유지, 민간의료지원단 설치지역 설정 등 육상현장의 모든 민원요구는 소방긴급구조통제단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외부 지원기관 통제관리도 어려웠다. 전화로, 직접 찾아가서 또는 관계자를 불러서 또는 찾아오는 민원인을 상대로 큰 소리를 많이 하다 보니 목소리가 점점 잠기기 시작했다. 마땅히 추위를 피할 공간이 없이 하루 밤을 꼬박 세다 보니 감기가 재발했는지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2번째 근무는 이틀 후 4월 20일이었다. 이때도 역시 요구조자는 없었고 주로 희생자였다. 내 임무는 선착장에서 희생자를 해경 경비함으로부터 인계받아 1차 검안소로 희생자를 안치하고 검안을 마치면 2차 검안소로 들 것을 이용 운구하는 일을 총괄하는 것이었다. 사고현장에서 희생자를 실은 해경 경비정이 도착한다는 소식이 왔다. 분주했다. 희생자에 대한 예우 등 운구방법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고 들것 이상 유무를 점검했다.

드디어 갑판위에 나란히 하얀 천으로 덥혀있는 4구의 희생자가 눈에 들어왔다. 분노가 일어난다, 왜 저들이 여기에 누워 있어야 하는지… 고3 아들이 생각난다. 흐르는 눈물을 부하직원들에게 보이기 싫어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뜨거운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직원들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2차 검안소로 운구하면서 혹시나 감정이 북 받쳐 실수할 직원들을 향해 “야! 힘내 마음 단단히 먹고, 하나, 둘”구호를 마쳐 주었다.

2차 검안소에는 실종자 가족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00아 집에 가자. 왜 여기에 있어 엄마가 미안해”, “엄마 우리 00이 어떡해” 저 가슴 밑바닥에서 흘러나오는 울부짖음과 통곡에 아! 울지 말자 마음 굳게 먹자 했는데 가슴이 먹먹해지며 또 함께 엉엉 울고 말았다. 검안과 가족확인이 끝났다,

이제는 고귀한 희생자를 병원으로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다. 구급차 뒤 좌석에 희생자가 모포에 둘러싸인 채 안치되고 여자구급대원 혼자 올라탄다. 가족이 실신하여 병원에 후송되었기 때문이다. “혼자 갈려고?” 나의 물음에 “할 수 없잖아요. 괜찮아요”라고 한다. 또 다시 울컥한다. 역시 당신은 멋진 소방관이야. 그 어느 공무원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중 후일담이지만 갈 때는 아직 살아있는 환자라는 생각에 괜찮았었는데 병원 영안실에 안치하고 빈차로 돌아올 때는 너무 무서웠다고 한다.

앞에 내용은 필자가 진도 팽목항 사고수습현장에서 일기처럼 적어놓은 글을 일부 옮긴 것이다. 생계를 내 던지고 달려와 가족을 돌보던 많은 이름 없는 자원봉사자, 희생자를 수습하며 빗물에 눈물을 닦아가며 24시간 현장을 지켜온 나의 동료들의 희생과 봉사가 세월호 희생자 가족의 아픈 심정을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지금도 잠자리에 들 때면 임시 안치소에 누워있는 어린 학생들의 하얀 얼굴과 비 내리는 부둣가에 자식이 아끼던 기타와 그렇게 사 달라고 조르던 운동화를 놓고 애간장이 끊어지는 그리움을 노란리본에 적어 묶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며칠째 실종자 수색소식이 없다. 소방관들은 팽목항 현지에서 애타는 가족을 외면할 수 없어 슬픔을 함께하며 근무하고 있다. 요즘 국회와 정부는 재발방지를 위해 국정조사를 하고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이 소방관들에게는 슬프기만 하다.

밤낮없이 희생자 수습과 가족보호에 혼신의 힘을 다했음에도 “세월호 침몰시 구조 대신 중앙부처 높으신 분 의전만 챙겼다.”는 사실과 다른 이야기와 소방방재청을 해체하고 소방공무원 국가직 요구를 반대한다는 이야기가 회자 될 때는 깊은 상처가 되어 아리고 쓰라림을 느낀다.

오직 국민만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국민의 생명을 지킬까 라는 고민에서 나온 소방공무원의 국가직화나 소방장비와 인력의 확충 주장이 그렇게 사치스럽고 무리한 요구일까?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세월호 참사현장에서 느꼈던 못 다한 이야기를 써내려가 볼까 한다.

<목포타임즈신문 제104호 2014년 7월 16일자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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