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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보훈청과 함께하는 우리고장 애국지사 / <5>의병장 심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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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보훈청과 함께하는 우리고장 애국지사 / <5>의병장 심남일
  • 호남타임즈
  • 승인 2013.03.18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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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남일 의병장 사진
▲이름 : 심남일(沈南一)
▲생애 : 1871년 2월 10일 ~ 1910년 10월 4일
▲출신지 : 전남 함평
▲운동계열 : 의병
▲소속 및 직위 : 의병장
▲훈격 : 독립장(1962)▲공적내용
심남일은 1871년 2월 10일(음력) 전남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새터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학문을 닦아 사서삼경에 능통하였고, 향리에서 면장·향교장의·도의사 등을 역임하고 또 서당의 훈장으로서도 재직한 바 있는 향반이었다.

노일전쟁 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 되고,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통분을 금할 길 없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의병장 김 준의 아우 율의 부장이 되어 장성·영광·함평·남원·보성·장흥 등지에서 일군과 항전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김율이 전사하자 스스로 대장이 되어 군율을 엄히 하고 진용을 재정비하였다. 그는 향리에서 도학으로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규율을 엄히 하고 민폐를 적게 하기 위하여 민가의 재물을 약탈하거나, 무단 내정돌입과 부녀자를 겁간하든지, 가축을 희생시키는 일 등에 대하여 엄히 처단할 것을 공포하였다.

1907년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에서 기치를 올려 의병을 모집·훈련하기 시작하여 1908년 2월 13일 남평으로 행군하면서 적과의 접전을 감행하였다. 그해 10월 말까지 전투에서 큰 성과를 올렸으나 불행하게도 심남일과 선봉장 강무경이 병석에 눕게 되어 다음해 봄까지 은신하였다. 1908년 음력 3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능주 노구두, 함평 석문산, 능주 석정, 남평 거성동, 보성 천동, 1909년 음력 7월 장흥 봉무동 전투에 이르기까지 수십 회에 걸쳐 일본 군경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또한, 그는 각 의진 간의 연합작전을 매우 중시하여 전남 동부 지역에서 활동하는 안규홍 의진, 서부지역의 전해산 의진과도 연합을 주장하여 하나의 연합체인 호남동의단을 결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1개 의병부대로 조직된 호남동의단의 맹주에는 의병장 전해산을 추대하고, 자신은 제1진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전해산 의진과 안규홍 의진과 긴밀하게 협조하며 항일투쟁을 선도함으로써 이들은 호남지역의 3대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에 일제는 1908년 후반부터 선생을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선생을 비롯한 호남의병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작전을 모색하여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1909년 8월부터 2개월간의 토벌은 살육, 방화, 약탈, 폭행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되어 수많은 의병장과 의병들이 피살, 체포되었다.
1909년 10월 9일 선생은 부대장 강무경과 함께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잠복해 있다가 체포되었고, 그로부터 1년 후인 1910년 10월 4일 대구 감옥에서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제공 : 목포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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