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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보훈청과 함께하는 우리고장 애국지사 / <8>의병장 김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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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보훈청과 함께하는 우리고장 애국지사 / <8>의병장 김용구
  • 호남타임즈
  • 승인 2013.04.09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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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장 김용구
▲이름 : 김용구(金容球)
▲생애 : 1861년 11월 1일 ~ 1918년 12월 21일
▲출생지 : 전남 영광
▲운동계열 : 의병
▲훈격 : 독립장(1926)
▲공적내용
본은 상산이다. 송사 기우만의 문인으로서 전라남도 영광 출신이다.
1907년 8월 8일 한문 수학하던 중에 구한국군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다는 소식에 접하였다. 성재 기삼연과 함께 비밀히 국사를 도모하여 무기를 운반해 두었다가 일이 누설되어 성공하지 못하고 수련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모든 의사들을 모아 놓고 피를 뿌리며 단에 올라 천지에 맹서하고 호남 창의 회맹소를 설치하였다. 성재가 대장에 추대되고, 도통령에 김용구가 임명되었다. 이때 참여한 상당한 수의 인물이 후에 개별 의진을 구성해 호남 의병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호남 창의 회맹소의 역사적 의의는 적지 않다.

이들은 격서문을 작성하여 각 지방으로 돌려서 의병운동에 동참해 나라의 원수를 갚을 것을 전하였다. 8월 11일 동지 박용근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자 수백 인의 자원병이 그를 따랐다. 그날 밤으로 그들을 무장시켜 가지고 다음날 영광읍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 적병과 접전하였으나 불행히 병기가 좋지 못하여 적에게 패하였다. 그 후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여러 곳으로 어진 이와 지혜로운 이를 찾아다녔는데, 담양으로 가서 고녹천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이어 구례 화엄사에 가서 탐문한즉 그가 지리산 상봉 토굴사에 있다 하므로 곧 석벽과 밀림을 헤치고 찾아뵙고 토적 구국의 방략을 의논하고 행동을 개시하게 된 것이다.

8월 26일 화개시에서 왜적 10여 명을 포살한 이후 호남지방에서 수십 차례의 전투를 벌리고 수백의 적을 포살 또는 사상시켰으나 12월 말 성재 기삼연이 발을 다친 까닭에 걷기가 불편하여 더 이상 종군할 수 없어 김용구가 후임을 맡아 군병을 대신 거느리고 전투를 계속 해 나갔다.

한편 기삼연은 순창 흥복산 속에 사는 재종제인 구연의 집에서 치료하면서 재기를 꾀하고 있었으나 음력 정월 초하루에 적의 포위를 받아 결국 체포당하여 음력 1월 2일 광주시 서천교에서 적의 흉탄에 해침을 당하고 순국하였다. 그 후 김용구의 의진은 성재의 중군장이었던 김태원·김 율 등과 연합 의진을 구성하기도 하면서 적과 교전하였다. 1908년에도 수차례의 전투를 벌이며 적을 무찔렀으나 4월 17일 무장 와공면에서 머무르던 중 적의 기습에 맞서 수십 명을 사살하였으나, 총상을 입고 고산으로 후퇴하여, 18일 방장산에 머물렀다. 그러나 정신이 계속 혼미하자, 군통수권을 박도경에게 위임한 뒤 장성 백암산에서 3∼4년 동안 부상을 치료하였다. 그 뒤 1911년 봄 이후로 금산에 은신하며 기회를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자료제공 : 목포보훈지청>
<밝은 지역사회를 열어가는 목포타임즈/호남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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