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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보훈청과 함께하는 우리고장 애국지사 / <12>장석천 애국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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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보훈청과 함께하는 우리고장 애국지사 / <12>장석천 애국지사
  • 호남타임즈
  • 승인 2013.05.2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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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석천(張錫天)
▲생애 : 1903년 2월 25일~1935년 10월 18일
▲출생지 : 전남 완도
▲운동계열 : 학생운동
▲소속 및 지위 : 성진회, 독서회 주모자
▲훈격 : 애국장(1990)
▲공적내용
전남 완도(莞島) 사람이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수원고등농림학교를 거쳐 1926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를 다니다가 4개월만에 중퇴하고 동년 7월에 귀향하였다.
그 후 광주지방의 학생운동단체인 성진회(醒進會)를 지원하였고, 1927년 3월 졸업기를 당하여 성진회원을 광주읍내 중국요리점에 초대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며 격려하였다.

한편 그는 동년 4월에 전라청년연맹 당무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동년 10월에는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에 가입, 1928년 12월에 신간회 광주지회의 상무간사로 임명되는 등 사회활동을 펴면서 항일학생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1월, 광주고등보통학교생 여도현(呂道鉉)에게 “항일투쟁의 강화는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동년 3월, 광주 내 각 학교의 졸업기에 임하여 임종근(林鍾根) 외 4명을 광주읍내 중국요리점 ‘연빈루’에 초대하고 항일운동방안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동년 5월에는 최규창(崔圭昌)·나승규(羅承奎)·김상환(金相奐)·김보섭(金普燮) 등과 함께 독서회원의 재정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소비조합 조직을 준비하기도 했다. 이렇게 광주지역의 항일학생운동에 관계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29년 11월 3일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장재성(張載性)·박오봉(朴五鳳)·강석원(姜錫元)·국채진(菊埰鎭) 등과 함께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하고 학생투쟁을 지원하는 한편,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각 업무를 분담하였는데 그는 광주 및 전국 학생의 행동지도를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동월 7일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상을 조사하고자 ‘학생전위동맹(學生前衛同盟)’에서 파견한 권유근(權遺根)과 만나 운동전개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고 전국적 학생시위운동으로 확대시킬 것을 협의하였다. 동월 12일에는 서울로 잠입한 학생전위동맹의 간부 차재정(車載貞)·정종근(鄭鍾根)·곽양훈(郭良勳) 등과 만나 서울학생의 거사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내용과 함께 항일투쟁궐기를 촉진하는 격문 약 2만장을 비밀리에 인쇄하여 전국에 발송하는 등 계속 활동하다가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피체되었다.

그 후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보안법, 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받았으며,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경성방직공장 종업원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소요배후조종자로 일경에 피체되어 1932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다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자료제공 : 목포보훈지청>
<밝은 지역사회를 열어가는 목포타임즈/호남타임즈>

<목포타임즈신문 제60호 2013년 5월 29일자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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